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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양정

    춘천은 상고시대에는 맥국의 도읍지로서, 삼국시대에는 영서지역의 중심지로, 그리고 조선조부터는 강원특별자치도의 수부도시로서 지역발전을 이끌어온 유서깊은 고장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되어온 춘천의 역사의 현장은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옛날 춘천의 역사적 의의를 되집어 보면서 춘천의 새로운 면모를 가다듬고 새로운 한세기를 열어가는데 중요한 정신적 바탕으로 언제나 함께할 것입니다.

    춘천의 고려시대에는 어떤 일이

    918년 궁예를 축출한 여러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왕건(王建)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고려 태조는 936년에 군현제를 원칙으로 하는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고려 태조의 지방제도 개편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에 세거하였던 지방 세력을 회유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춘천은 광해주에서 춘주(春州)로 고쳐지게 되었고, 이 당시 이 지역에는 신라 말에 세거하였던 호족이 존재하였으니, 이 세력이 박유(朴儒)였다.

    다-① (태조 원년 6월)계해에 은사(隱士) 박유가 와서 뵈니 관(冠)과 대(帶)를 주었다. (『고려사』 권 1, 태조세가1, 태조 원년 조)
    다-② 본 성명은 박유(朴儒), 자(字)는 문행(文行), 광해주 사람으로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궁예의 원외(員外)로 처음 벼슬에 나갔으며,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다. 궁예의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출가하여 산곡(山谷) 사 이에 숨었다가 태조가 즉위한 것을 듣고 태조에게 와 뵙자 (태조가)예로서 대하며 말하기를 "좋은 정치를 하는 도는 오직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데, 이제 경이 온 것은 어진 재상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하고, 관대(冠帶)를 내리고 기요(機要: 중요한 일)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공(功)이 있자 드디어 성(姓)을 내려 왕 씨로 하였다. (『고려사』권92, 열전5, 왕유조)
    다-③ 진보성주(珍寶城主) 홍술(洪術)이 사자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니 원윤(元尹) 왕유와 경(卿) 함필 등을 보내어 위로하고 설복하였다. (『고려사』권1, 태조세가 1, 태조 5년 11월조)
    다-④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는 춘주인으로 대광(大匡) 유(柔)의 딸이다. (『고려사』권88, 후비전 태조)

    이를 통하여 볼 때 춘천지역에 박유라는 호족세력이 존재하였으며, 그에게 사성(賜姓)하여 이 지역에 대한 세력을 인정하고, 또한 자신의 세력으로 편제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사료다-②에 의하면 박유는 처음에 궁예를 섬겨 동궁기실이 되었다고 한다. 이 동궁기실은 태자를 교육하는 일이었는데, 그가 이러한 일을 맡았다는 것은 궁예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유는 궁예의 폭정을 피하여 산곡에 숨어들었다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 다시 정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위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조 왕 건으로부터 성(姓)을 받기도 하고 그의 딸은 태조의 부인이 되기도 한다. 즉 태조 왕건의 호족 연합정책에 의하여 박유의 딸도 왕건의 부인이 되며 이러한 관계에 의하여 춘천지역은 박유의 세력기반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 23년 춘주(春州)로 군현의 명칭을 개정한 것은 유력한 호족이 사는 춘천 지역을 군현 명칭의 개정을 통하여 이에 상응하는 예우를 해 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최영희, 1994, 『춘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23쪽) 춘천 박씨 세력은 고려 고종·충열왕 때 원과의 외교에서 크게 활약한 박항(朴恒)이 이곳의 향리 출신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계속 세거하면서 토성화(土姓化)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초기에 활약한 인물로 신숭겸을 춘천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묘가 현재 춘천시 방동리에 자리 잡고 있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신숭겸을 박유와 같이 춘천을 기반으로 한 호족세력이었다고 보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의 생시에 태조 왕건으로부터 황해도 평산을 그의 고향으로 인정받았고, 그의 후손들에게서도 평산 신씨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점을 비추어 볼 때, 토착세력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묘가 춘천에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춘천을 언급할 때 신숭겸이 거론되는 것은 그러한 연유이며, 이제 신숭겸 묘는 역사적으로 춘천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려는 건국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지방행정제도가 변하게 되는 데. 이는 고려의 지방지배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고려 초기 지방 지배는 호족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지배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조세의 징수와 보관을 담당하거나 개경으로 운반하는 전운사(轉運使)와 같은 임시직 관리가 있는 정도였다. 그 후 성종 14년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10도를 설치하는 동시에 종래의 12목을 12軍 절도사제(節度使制)로 바꾸고 도단련사(都團練使)7, 단련사(團練使)11, 자사(刺史)15를 설치하였다. 이 때 강원도 지역에는 영동도와 삭방도가 설치되어 북한강 유역을 삭방도가 관장하게 되었으며, 삭방도에는 교주(회양)와 춘주(춘천)에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지방 제도는 몇 차례에 걸쳐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종9년(1018년)에 5도(道) 양계(兩界)를 근간으로 하는 지방제도가 완성되는데, 5도는 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를 말하며, 이는 민정적인 행정조직이며 장관은 안찰사(按察使)였다. 한편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는 군정적 행정 조직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장관으로 하였다. 이때 춘천을 비롯한 북한강 유역 일대는 교주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조직이 존재했지만 사실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고, 명칭도 자주 변하였는데, 교주도의 경우에도 춘주도·강릉도·동주도 등의 명칭이 함께 쓰여 지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춘천은 외적에 의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거란족, 몽골, 왜구의 침입 등 고려시대 사회가 겪었던 시련을 춘천지역도 예외없이 겪었는데,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거란군의 침입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는데, 1211년 몽고가 여진족의 금(金)에 대한 정벌을 개시하자 금(金)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만주 지방의 거란족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1216년경 몽고군에게 쫒기자 고려 영내로 도망쳐오게 되었다. 고려의 김취려(金就礪)등이 청천강 이북에서 격퇴하였으나, 개경까지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철원, 원주, 횡천(횡성)등 강원도 지역에까지 공격하였으며, 춘천도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춘천의 주민들은 봉의산 성에서 항전하였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안찰사 노주한(盧周翰) 이하 많은 관속들이 살해되었다.
    처음 철원을 거쳐 들어온 거란군은 횡천(횡성), 경기도 장단, 경기 양평 등을 공략하고 원주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원주 법천사(法泉寺)를 침입했다가 고려군이 추격하자 제천 방면으로 도망하였으며, 결국 명주로 쫒겨가게 되는데, 이때의 거란족 침입으로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의 피해가 막대했다. 그 후 고종 18년(1231년)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게 되는데, 특히 제5차 침입 시 주 무대가 강원도 지역이었고, 다시 춘천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고종 40년(1253년) 7월에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은 서경(평양)과 토산(평남 상원), 양산성(황해 안악)을 거쳐 8월에는 철원의 동주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9월 20일에 안찰사 박천기(朴天器)가 지키던 춘주성을 도륙하였다.


    라-① 조효립(曹孝立)은 고종 40년 문학(文學)으로 춘주에 있었는데, 몽고병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판 다음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성 안의 우물은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잡고 그 피를 마실 정도여서 사졸(士卒)의 곤함이 심하였다. 이에 효립은 성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 (『고려사』권121, 조효립 전)
    라-② 안찰사 박천기는 대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먼저 성 안의 전곡(錢穀)을 불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리고 목책을 파괴하고 포위를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참호를 만나 나가지 못하여 한 사람도 살아난 자가 없었다. (위와 같음)
    라-③ 몽고병이 춘주를 함락할 때 박항(朴恒)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죽은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성 아래에 쌓인 시체가 산과 같은데,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묻기를 300여명에 이르렀다. (『고려사』권106, 박항 전)

    위의 사료를 통하여 몽고군의 춘주성 침입에서 그 피해가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성 안에 갇혀 몽고군과 대항하던 당시의 고려군의 절박함을 잘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춘주성과 주민이 처절하게 끝까지 항전한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춘주성 즉 오늘의 봉의산성에서 항전하던 사람들이 대다수 전사할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다면 결국 춘주지역에 있던 여러 문화유적이나 시설들이 많이 파괴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미 주지하다시피 경주의 황룡사가 전소되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주의 법천사가 몽고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면 춘천지역에 남아있던 사찰이나 기타 유적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며, 이러한 것을 통하여 당시 몽고군의 침입으로 온 국가의 피해가 인적 물적으로 엄청 났을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춘주성 전투는 몽고와의 전쟁에서 특히 비장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전쟁이 계속되고 내륙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컸으므로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몽고와 강화(講和)를 맺으려는 온건파가 득세하여 마침내 고종 45년(1258년)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을 일으켜 김인준(金仁俊)이 최의(崔宜)를 타도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 고려 태자가 몽고 방문을 허락하는 강화를 맺고 몽고를 물러가게 하였으며, 이어 원종 11년(1270년) 강화도(江華島)에서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김인준을 비롯한 임연, 임유무 등의 무신들도 제거되어 무신정권은 100년 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원(元)과의 강화(講和)로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원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권문세족들이 정치적으로 득세하였다. 고려 후기는 원의 간섭과 고려왕들의 잇따른 개혁정치의 시도로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새로이 사대부 층이 성장하여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아직 정치세력화 할 정도의 힘은 갖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시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행위를 함으로서 고려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침략지역도 전국적이었으며, 특히 우왕 9년 왜구는 강원도 내륙을 침략하였는데, 영월·평창·정선·강릉·횡성 등 강원도 거의 모든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마- ① 우왕 9년(1383년) 10월 왜구가 강릉으로 쳐들어와 회양, 김화, 낭천을 함락시켰는데, 체복사(體覆使) 정승가(鄭承可)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춘주로 물러나 주둔하니, 왜적이 추격하여 춘주에 이르러 이를 함락시키고 가평현까지 침입하였다.........왜구가 춘주 청평산에 들어가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 『고려사』 권135 열전 신우전 )

    위의 사료를 통해서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방과 북한강 유역 일대가 왜구의 침입으로 약탈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료에 의하면 이해를 고비로 왜구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침입도 감소되었다. 이것은 고려가 화약이나 화포를 개발하여 왜구에 대응한 것이 성과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유난히 외적의 침입이 많았는데, 이것은 전국적인 상황이었으며, 춘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최영희, 1994, 「춘천군의 역사」 『춘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림대학교 박물관·강원도·춘천군.
    * 박한설, 1996, 「1896년 8월 이전의 역사-고려시대-」 『춘천백년사』(춘천백년사편찬위원회).
    * 김용선, 1999, 「북한강 유역의 중세사」 『한강유역사연구』, 사단법인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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