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춘천에 친일은 없었다
박왕호 2020-09-27 195
지난 9 월 발간된 시정소식지 봄내에 그 옛날 춘천 이라는 제하로 모 학예연구인의 일본강점기 학교의 가을운동회를 다룬 글문이 실렸다. 글 중 가을운동회를 소개하면서 일본강점기 식민치하 군국주의 정책에 의해 혹사당하는 당시 조선의 학교교육을 비판하고 있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당연히 조선총독부에서 목표로 정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여 식민노예화를 고착화시키는 목표로 일체의 모든 학교교육이 수단으로 동원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같은 조선총독부 식 교육은 이후 해방되고 오늘에 이르도록까지도 우리 국가사회 전반 곳곳에 일제잔재 라는 손가락질속에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50 년 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채상존하는 식민지교육의잔재에 물들고 있었을 거시다.이즈음은 초등학교 라고 지칭되는 국민학교 시절, 나도 가슴 설레이며 봄과 가을의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또한 운이 좋은 해에는 가을소풍에다 가을운동회가 겹쳐지는 행운의 즐거움을 만긱하기도 하였다. 그 가을운동회의 기억은 나이 든 오늘날 까지도 심장의 박동을 일깨우는 추억에 젖게 한다. 가을운동회에서 고학년 남자아이들의 가슴을 상무정신으로 용솟음치게 하는 종목은 단연 기마전일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로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뜨거운 호연지기에 사로잡히게 하는. 고학년에 해당하는 4,5,6 학년 남자아이들 만으로 구성되는 기마전은 그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였을 것이다. 청군과 백군. 두 팀으로 나뉜 수백명의 소년들이 4인 1조의 기마대를 구성한 속에 귓전으로 배운 군가를 목이 터져라 목이 아픈 것도 모르는 채 소리쳐 부르면서 넓은 운동장을 이기겠다는 기백과 결기로 가득히 채우고, 그러다가 심판선생님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를 신호로 일대가 떠나갈 듯한 함성를 지르면서 상대편을 향해 나아가 작은 손으로 상대를 움켜쥐고 필사의 드잡이질을 벌인다 . 아편의 승리를 위하여 필사적인 저항과 공격을 감행하는 소년기마군단의 이 대 접전은 지켜보는 이들 조차도 심장의 박동을 들뛰게 하는 호연지기와 상무정신의 장관이었을 것이다. 또한 장대쓰러뜨리기 종목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 이 종목은 5,6 학년 소년들의 경기로 기억되는 바, 청.백 양팀이 굵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놓고 먼저 쓰러뜨리는 쪽이 이긴다. 이것 역시 기마전 못지않는 소년들의 감투정신과 호연지기를 일깨우는 종목 이다. 그 중 건장한 체격의 소년들이 장대를 굳건하게 붙잡고 , 그것을 수비하는 소년들은 어깨동무나 팔짱을 서로 엮고 서서 장대 둘레를 견고하게 애워싼 속에, 공격팀들의 진입을 저지할 태세를 갗춘다. 시작을 알리는 심판선생님의 호각신호와 함께 운동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 온 공격팀은 필사적으로 그 인간목책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장대에 매달리고...쓰러지는 장대의 각도를 지켜보던 심판선생님의 호각소리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고 경기는 끝이 난다. 이에 승자가 된 편 소년들은 목이 터져라 기쁨에 찬 함성을 지르면서 돌아간다. 오늘 이새대의 그 나이 소년들로서는 절대로 체험해 보지못 할, 만긱하지 못할 호연지기의 순간이며 상무정신의 발산 현장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책자 속 필자가 언급한 텀불링 시범도 있었다. 이겋 또한 남자아이들 만의 종목이었다. 5,6 학년 들로 만 구성된. 이 종목은 난이도가 있고 위험성도 높은 만큼 엄격한 기준을 두고 구성원을 선발하였다. 체력적으로 열세하거나움직임이 둔한 아이들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나도 5 학년 때 부터 선발되어 6 학년 때 까지 2 년 동안을 텀불링 시범팀에서 활동했다. 내 기억으로 한달 전 쯤 부터 방과 후에 따로이 남겨져 연습을 하였다. 난이도 있고 위험한 만큼 지도교사는 매사에 철두철미하게 관리를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책자 속 필자의 지적 처럼 가혹한 기합이나 구타는 단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히려 중간 쉬는 시간에는 간식이 지급되었다. 먹거리가 귀하고 모두가 배고픈 그 시절로서는 간식으로 지급되는 그 작은 계란빵 한 조각이 어린 소년들에게는 입에 군침을 머금으며 기다려지게 하는 새로운 에네르기의 충전 순간 이었다. 그 필자의 경우에는 어떤 경험을 하였기에 구타와 기합이 난무하는 텀불링 이라고 매도하였는지! 물론 그 강점시기를 살지 않은 터에 그 시절을 단정하지는 않을 것이나, 해방된 뒤에도 오래도록까지 구타와 가혹행위가 난무하는 텀블링 이라고 지적함은 혹시 저변에 어떤 선입감을 깔고 짐작이나 상상만으로 쓴 글문은 아니었는지! 일본강점기 중에 남겨진 일체의 모든 것은 일본의 식민잔재로 단정하고 매도하려는 선입감으로.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일본 강점기 식민통치 과정을 통해 그들의 교육제도의 손을 거쳐 전해받은 텀블링 이라 할지라도,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체득하고 전달받는 지식이라 할지라도 정신과 신체에 흐르는 주체적 민족의식 마저도 일본화되어 버렸다는 선입감이라면 그 세대에 대한 지나치고 일방적인 폄하는 아닌지. 그 시대를 견디며 고래로 부터 전해지는 땅덩어리를 지켜 온 세대를 일본으로 물들고 오염된 폐해의 세대라고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매도하려 함은 지나친 아전인수 적 오만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오늘의 그와같은 시각 과는 달리 식민통치가 극에 달해 있는 그 시국에도 그 엄혹한 시절을 견뎌가는 선열들의 가슴속에 자리하는 민족혼은 조금도 변질당하지 않은 속에 굳건하게 지탱하며 용솟음치고 있었다. 필자가 소개한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
그 가혹하고 냉엄한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화 교육 속에서도 그 춘천고보학생들은 가슴속에 간직한 뜨거운 민족혼을 담금질 하듯 무시로 학교를 뛰쳐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쳐 부른다. 지금도 그날의 그곳에 자리하는 춘천역. 그 너머의 대바지강. 오늘에는 의암댐과 춘천댐의 중간 자리에서 물에 잠겨버린 그날의 대바지강 모래밭. 몸속을 흐르는 뜨거운 민족혼의 열기를 억누를 수 없는 그날의 춘천고보학생들은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키하여 때때로 그곳 대바지강 강녘에 모여 소리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가혹한 매질뒤에 감방에 갇히고, 그 시절은 더욱 혹독한 겨울추위속의 감방 안은 불기 하나 없어 학생들은 맨발이 얼어 동상으로 피고름이 흐르고 발톱이 빠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저항의식으로 맹렬하게 민족혼을 지켰다. 다만 아이러닉한 일은, 그렇게 갇힌 조선학생들을 석방시키려 좇아다닌 학교관계자는 우리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선생들이었다는 점 이다. 물론 반일 저항정신에 투철한 조선학생들이라는 차별성 이전에 가르치는 입장의 훈도 앞의 제자 라고 하는 사도적 가슴에 바탕한 교육자적 양식의 발로였다 해야할 것이다. 그런끝에 풀려난 학생들은 교도실에 불려가 곤장세례를 받은 뒤에 교실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하여 그들 학생들의 가슴에서 꿈틀대는 뜨거운 민족혼을 무엇으로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인가? 그들 학생들은 또 다시 대바지강가로 달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시 감방에 쳐박혀 가혹한탄압을 견뎌야 하였고.오늘 이 문재인 정권의 운동권 정치에서군것질 꺼리 처럼 입에 달고다니는 반일구호나 친일청산 프레임. 가혹한 시련속에서도 굳건하고 청아하게 민족혼을지키던 그날의 선열들 앞에 그런식으로 오용되고 남발되는 반일구호가 차라리 허접하다 여겨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어느새 그런 양식이나 가치 분별 따위에는 둔감해 버린 저급저속한 정치동물화 되어져 버린 집단적 속성의 단면은 아닍지!
그렇듯,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지교육 체제에 기반하여 설정된 학교교육의 틀에 의해 시행된 교육제도에 길들여지고, 습득된 지식을 전달받은 해방 이후 세대. 그러하매 그들 어린 소년들의 정신마저도 일본화되어졌다 단정함은 지나친 선입감이며 비약이라 지적한다. 비록 일본인 교사를 통해 전달된 기반이라 할지라도 해방된 조국의 교육현장저변에 기반을 이루는 감성과 감각은 우리 고래의 정신이며 감성이라 해야 한다. 오천년, 아니 그 이상의 팔천년 배달의 역사 속에서 굳건하게 다져지고 기본틀로 뿌리 깊어있는 우리 고래의 것으로. 그러함에 고작 4반세기 간의 순간적 공백이 있었다 하여 이국화되고 이국적으로 변질 변형되었다 한마디로 단정지어짐은 너무 경솔하고 경박하다. 그날의 춘천고보학생들의 그 치열하고 투철하던 민족의식 앞에서 그 누구가 감히 그 세대를 그런식으로 매도하고 비하할 자 있는가!?
운동회의대미를 장식하는 종목은 텀불링 시범 이었다. 그리고 그 텀블링 시범의 하이 라이트 이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피라미드 쌓기 였다. 해방된 나라에서 이땅의 어린 소년들에 의해 재현된 텀불링의 피라미드쌓기. 저들 일본인 교육프로그램에 의해 전수되어진. 소년들의 유약한 몸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는 인간 피라미드. 그런 끝에 완성되어진 6단 또는 7단 높이의 피라미드. 그 꼭대기에 우뚝 올라서는 소년. 그 소년에 의해 높이 치켜 올려지는 화려한 태극기 한 폭. 고공의 공포를 무릎쓰면서 그 한폭의 태극기를 높이 쳐들어 올린 어린 소년의 기개. 그 작다 하나 대대한 기상. 그 순간을 그 누가 조선총독부의 왜색이라 손가락질 하겠는가? 어디 함부로 감히.
우렁찬 함성으로 나아가는 소년기마대의 패기. 그것을 일본식민통치가 남긴 일본 무사도정신의 일단이라고 만 매도하려는가? 그렇다면 우리 몸속에 내재되어있는 고래의 상무적 기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우리 삼국시대를 거치는 속에서, 고려시대 7 차에 걸친 글안족 과의 전쟁, 몽골과의 30 년 전쟁과 조선조 7 년에 걸친 임진왜란. 그 지루하도록 고단한 역사속에서 뿌리 깊은 근간으로 이루어지고 형상화 되어진 우리 고래의 상무정신과 호연지기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찾아야 하는가? 오로지 짧은 한 순간의 정권에서 제시해 놓은 정치적 구호에 편승 부응하고자 하는 편향적 시각에서 이미 정형화 되어있는 색깔만이 보일 뿐인가?
비록 어쩌지 못하여 일본옷가지를 걸치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날의 세대. 그러나 그랬다고 하여 그 옷속에 들어있는 그들의 몸 까지도 일본화 되었다 감히 함부로 매도할 자 누구인가? 그 태극기를 높이 치켜올린 소년의 기상은 그 모진 시련의 시간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잃지않고 민족혼을 간직해 온 선열들에 의해 전해진 우리의 민족혼 이다. 수천년 고래로 부터 이어져 오는 이땅의 소년들의 맹렬한 호연지기 이다. 그럴진데, 어디에 일본 조선총독부에 의한 피압박 노ㅖ화 정책의잔재라고 단정지어 매도할 군더더기가 있는가?! 그날의 그 기마전 이나 장대쓰러뜨리기 앞에 누가 함부로 일본에 의한 식민교육의 유산이라 단정하여 비난하려는가? 그렇다면 차전놀이, 외바퀴수레싸움 같은 집체적 토속경기에도 강점기를 거쳐 온 만큼 왜색이 묻어있다 말하려는가!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현대화 되는 교육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그같은 집체적 종목은 자연발상적으로 대두되었을 교육종목 이었을 것이다. 비록 엄중하고 혹독한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하나 그 와중에도 이 땅 곳곳에 자리해 있는 민족정신은 온갖 지혜로써 우리 고유의 전통과 정신을 잇게하고자 노심초사 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강요되는 조선총독부의 일본화, 식민노예화 정책에 순응하면서도 곳곳에서 우리민족만의 특성과 전통을 잇게 하기위한 노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리 조선학생들 또한 일방적으로 일본화 교육에 순응하지 않았음을 그날의 춘천고보학생들의 뜨거운 혈기가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다.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앎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넋을 억누른다 주장하는 칼 마르크스.
몽상적 사상가 칼 마르크스. 세기 반 전 공산주의 라는 몽상 적 정치이론으로인류와 문명을중세적 암흑속에 싸이게 한. 그가 설파한 공산주의 라는 이론이 허구 이며 망상이었듯 그가 주장했다는 그 죽은세대론 또한 잘못된 억측이며 오도 이다. 오히려 죽은 세대의 전통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어 오늘 살아있는 세대의 넋을 뜨거운 피로 용솟음치게 한다. 반면 오늘 이날 까지도 저 세기 반이나 해묵은 마르크스의 망상론을 숭배하며 그 주장을 과시적으로 회자하는 자들이 있어 시대와 교육은 다시 그만큼 퇴보하며 혼돈속에 싸이게 하는 앎적 요소로 작용한다. 그 진부한 이론을새삼 들추기 보다는 이 시대 손바닥 안의액정세계에 빠져 앞 세대의 그 호연지기나 상무정신 으로 부터 망각당한 속에 살아가는 오늘의 어린 세대를 위해 고뇌하는 교육현장 이어야 한다는 절박한 바람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