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美軍] 아, 장진호(湖)!
천영수 2017-06-28 214
▲ 혹독한 추위에 동사(凍死)한 美해병대 장병들의 시신.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면서 20대 전후의 이 젊은이들은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 철수하는 미군병사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리는듯 하다.
美해병대는 해병대 전통에 따라 부상자뿐 아니라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을 거둬 함께 철수했다.
장진호(湖)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美 해병1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 1만5천여 명이 개마고원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다가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후퇴에 성공한 전투이다.
美 해병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괴군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던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으며, 미군의 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美 해병1사단 외에 美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자신들의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국군 병력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이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명, 민간인 10만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작전을 말한다. 흥남철수 작전개시일에 평양에서도 같이 철수했다. 이른바 1.4후퇴다.
장진호전투에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그 과정에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위 사진이 상징하듯 미군의 희생도 컸다. 미 7사단 사망자만 무려 2천 5백여명.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죽어갔을까?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 미군들의 목숨값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